이청준이 유일하게 감춘 건 '한 여인의 이름'이었다

입력 2023-08-14 18:47   수정 2023-08-15 00:27


그가 감췄던 건 한 여자의 이름이었다. <당신들의 천국> 등을 쓴 한국 대표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은 폐암 선고를 받은 뒤 이윤옥 문학평론가(65)에게 자신의 평전을 써달라고 부탁하며 편지와 일기, 소설 초고를 전부 내줬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심사 탈락 후 적은 저속한 욕설까지 담겨 있던 일기장에서 이청준이 오려낸 건 결혼 전 한때 연심을 품은 현영민 씨의 이름뿐이었다. 이 평론가는 현씨를 비롯해 이청준 소설 속 여성인물의 원형이 된 ‘이청준의 여성들’을 평전을 통해 밝혀냈다.

최근 <이청준 평전>을 펴낸 이 평론가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간 이청준 문학에서 가장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 여성들인데, 관련 연구의 실마리를 마련해 자부심을 느낀다”며 “평전의 목표는 이청준 문학 읽기에 ‘두께’를 더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걱정이 됐던 건 이청준 선생 부인의 반응이었죠. 그런데 워낙 담대한 분이어서 평전을 읽은 뒤 좋았다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하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럼 됐구나’ 싶었습니다.”

올해는 이청준 작가의 15주기다. 그는 영화로 제작된 ‘서편제’와 ‘벌레 이야기’(영화 제목 ‘밀양’) 등 170편 넘는 작품을 발표하며 광활한 작품세계를 펼쳤다. 이 평론가는 한국 현대 문학사의 거목이었던 고인의 삶을 다시 쓰기 위해 10년 넘도록 자료를 분석하고 주변 인물을 찾아가 일화를 수집했다.

평전은 거장의 사소한 거짓말이나 그가 품은 세속적인 욕망을 밝혀낸다. 고인은 평소 “신춘문예에 7번 낙방한 뒤 1965년 단편 ‘퇴원’으로 등단했다”고 했는데, 실은 첫 응모작으로 등단했다. “다른 사람, 특히 글 쓰는 후배들을 생각한 거짓말”이었을 것이라고 이 평론가는 추측했다. 도시의 삶, 도시 여성에 대한 이청준의 열망을 조명한 부분도 눈에 띈다. 전남 장흥의 ‘가난한 수재’였던 이청준이 광주광역시로 유학 가면서 느낀 비애, 고교 시절 가정교사로 입주해 만난 부잣집 딸 현영민 씨에 대한 연심과 좌절이 그에게 작가로서의 성공을 꿈꾸게 만들었다고 봤다.

“이청준 선생이 자서전을 썼다면 평전보다 엄격했을 것”이라는 게 이 평론가의 설명이다. 이 작가는 별세하기 3~4개월 전 이 평론가에게 “소설가는 작품으로 교묘히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 부디 네 상상력이 내 상상력을 이겨서 내가 꾀한 모든 자기합리화를 벗겨 내 맨얼굴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했다.

평전에서는 이 작가의 새로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대문호가 부인 남경자 씨와의 연애 시절 “나에게 비둘기가 되어주오” 하는 글을 남겼다는 대목에선 웃음이 터진다. 글쓰기에 몰두해 사느라 집 비밀번호조차 몰랐다는 사실, 판소리뿐 아니라 클래식 애호가였다는 사실도 새롭다.

이 평론가는 이 작가에 대해 “모든 현상의 배면에 있는 본질을 보는 작가”라고 평했다. “우리를 억압하는 폭력, 부, 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면서 작품 속 개인이 오롯이 살아 있죠. 그래서 거대 담론이 실종된 21세기에 읽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앞으로 이런 소설가는 못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전 표지의 초상화는 서용선 화백이 이 책만을 위해 그렸다.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등을 수상한 서 화백은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 중인 ‘빨간 눈의 자화상’을 그린 그 작가다.

이 작가가 완성된 평전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질문을 받은 이 평론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어요. 항상 존댓말을 하는 분이니 ‘이 선생, 애썼네요’ 하실 거 같습니다. 비난도 칭찬도 쉽게 안 하는 분이셨으니까….”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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